
영화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를 보고 나니 언어를 배운다는 게 단순히 자격증 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 공부는 개인의 커리어나 소통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 속 나옥분 할머니에게 영어는 역사를 증언하고 세상을 바꾸는 무기였습니다.
민원왕 할머니의 진짜 얼굴
명진구청의 민원왕으로 악명 높은 나옥분 할머니는 수천 건의 민원을 넣으며 공무원들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주차, 쓰레기 무단 투기, 황산 폐기 현장까지 그녀의 낡은 카메라는 동네의 모든 위반법을 기록했습니다. 이 캐릭터를 보면서 유별난 노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졌습니다. 솔직히 공무원 입장에서 보면 정말 골치 아픈 민원이었습니다.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박민재가 부임하면서 두 사람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입니다. 번호표를 뽑으라는 민재의 냉정한 원칙과 옥분의 막무가내식 민원은 매일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옥분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간절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알파벳부터 시작하는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어 공부할 때도 하루 7시간씩 투자했는데, 젊은 나이에도 힘들었습니다. 옥분은 학원에서조차 수강 거부를 당하며 쫓겨났지만, 우연히 원어민과 유창하게 대화하는 민재를 목격하고는 그를 스승으로 만들기 위해 집요하게 따라다닙니다.
일반적으로 노년층의 어학 학습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옥분의 끈질긴 노력 앞에서 그 편견은 무너집니다. 민재는 처음엔 질색했지만, 옥분이 어린 동생 영재에게 정성껏 집밥을 차려주는 모습에 마음이 열렸습니다. 두 사람의 사제 관계는 단순한 영어 수업을 넘어선 진짜 유대감으로 발전했습니다.
침묵을 깬 증언의 언어
옥분이 영어를 배우려 했던 첫 번째 이유는 미국으로 입양된 남동생 정남과 대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동생은 옥분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이미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된 그에게 가난하고 아픈 한국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 장면에서 옥분이 영어 공부를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적을 잃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옥분의 가장 친한 친구 정심 할머니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면서, 숨겨왔던 진실이 드러납니다. 정심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전 세계를 돌며 증언해 왔고, 옥분 역시 같은 피해자였던 겁니다.
수십 년간 옥분은 가족의 반대와 사회적 시선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며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조차 그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는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침묵은 강요된 생존 방식이었을 뿐, 진짜 치유는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옥분은 이제 정심이 못다 한 일을 이어받기로 결심합니다. 영어는 더 이상 동생과의 대화 수단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영어 공부할 때는 그저 토익 점수가 목표였는데, 옥분에게 영어는 세상을 바꾸는 칼날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 의회 청문회장에서 옥분은 극도의 긴장감에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습니다. 일본 측 대표단은 "증거가 없다"라며 비웃었습니다. 그때 민재가 회의장에 나타나 "How are you, 옥분?"이라고 외칩니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옥분은 마법처럼 긴장이 풀리며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합니다.
이 짧은 문답이 옥분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줬습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창한 연설 기법이나 전문가의 도움이 아니라, 일상적인 안부 인사가 가장 강력한 응원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인간적이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옥분은 한국어로 먼저 고통을 토해낸 뒤, 영어로 배에 새겨진 흉터들을 보여주며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합니다.
We are the evidence라는 그녀의 외침은 회의장을 채웠고, 냉소적이었던 의원들도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증언은 객관적 증거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옥분의 몸에 새겨진 상처 자체가 살아있는 증거였던 겁니다.
영화는 옥분이 다시 미국을 방문하며 입국 심사관의 질문에 Of course!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침묵을 강요당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증언자였습니다. 제가 영어 공부를 통해 얻고 싶었던 건 그저 좋은 직장이었는데, 옥분은 영어를 통해 역사를 바꿨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머와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옥분의 까칠한 민원들이 사실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유별난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결론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억압된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제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면 단순히 점수가 아니라 제 목소리를 더 멀리 전하기 위한 도구로 바라볼 것 같습니다.